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즈키 젠코 (문단 편집) === 총리 재임 시절 === [[파일:attachment/스즈키 젠코/70.jpg]] [[1980년]] [[의회 해산|국회가 해산되고]] 중의원, 참의원 동시선거가 열린 가운데 5월 30일, [[오히라 마사요시]]가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자 오히라파에 속했던 스즈키는 "총리의 건강이 안좋은 것 같으니 사임하고 차기 정권을 물색하자"라고 발언했다가[* 다만 이 발언은 스즈키가 오히라를 끌어내리려고 했다기 보다는 오히라의 건강을 걱정해서 한말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.] 신문을 보고 격노한 오히라에게 '''이 천박한 [[하라구로]]놈!'''이라는 말을 들었다고... 하기야 결과적으로는 그 정권이 스즈키에게 넘어왔으니... 이후 자민당이 오히라 총리가 사망하면서 당초 정권교체가 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판세가 뒤집혀서 압승하였고, 차기 총리감을 물색하게 되었는데, 오히라에게 각을 세웠던 [[후쿠다 다케오]]나 고모토 도시오는 뻘쭘해지면서 총리로 나설 명분이 없었고 오히라의 친구이자 차기 유력주자였던 [[이토 마사요시]]는 "친구가 죽었는데 총리할 맘이 안 난다"고 고사했다. 또 후임 총리가 되는 [[나카소네 야스히로]]는 오히라 [[내각불신임]]안에 반대했지만 아직 킹메이커였던 [[다나카 가쿠에이]]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. 이래서 자연스럽게 오히라파에서 총리를 내게 되었는데 오히라파의 거두였던 [[미야자와 기이치]]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결국 오히라파와 다나카파의 가교 역할을 하던 스즈키에게 총리가 돌아가게 되었다. 이때 스즈키는 '''현질 안 하고 총리가 된 건 내가 최초 아닌가'''라고 후에 회고했다고. 이전 오히라 총리 시절에 자민당이 격하게 치고 박아 분당 직전까지 몰린 전례도 있고 해서, 스즈키 총리는 화합정치를 강조했다. 그 덕에 자민당의 내홍은 이전의 [[각복전쟁]]이나 시토카 항쟁과 비교하면 이후에는 많이 얌전해졌다. 경제적으로 당시 일본은 재정[[적자]]를 해소하기 위한 적자해소 국채 발행으로 재정에 문제가 생긴 상황이었다. 오히라 총리는 증세를 추진하려고 했다가 역풍을 맞은 바 있어서 스즈키는 증세론을 자제시키면서 증세없는 재정 건전화를 추진했다. 물론 현실적으론 적자해소 국채의 발행도 어려워지면서 사실상 증세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형편이긴 했다. 외교적으론, 당시 [[로널드 레이건|레이건]]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'''일미 동맹은 군사동맹은 아니다'''라고 발언했다가 [[미일관계]]가 악화되는 것 아니냔 안티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.[* [[기시 노부스케]] 등이 "대미 관계 개선을 위해 스즈키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"고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했다.] 또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가 터지자 [[한국]]과 [[중국]]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중 의견을 타진했다가 보수파들에게 '''"할 짓이 없어서 한국, 중국에게 사죄하러 다니냐"'''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. 그래도 [[2011년]] 한국 [[외교부]]가 공개한 외교 기밀문서에 의하면, [[전두환]] 군사정부 당시 [[김대중]] 전 대통령이 [[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|억울한 사형판결]]로 목숨을 잃게 생기자, 자국내 비판여론도 있고 해서 [[최경록]] 당시 [[주일대사|주일한국대사]]를 불러 '''사형판결 취소 안 하면 [[북한]]이랑 수교 협상한다'''고 압박했다고 한다. 자민당 내 계파 화합정치와 선거 승리로 장기 집권할 가능성도 있었지만, 현실은 [[1982년]] 차기 자민당 총재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약 2년만에 총리직에서 사임했다. 계파간의 합의에 의해 밀려났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. 어차피 [[1983년]] 선거가 자민당이 꽤 참패해서 물러났어야 했을 테지만.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